억누를 수 없는 / 마이크 켈리

미국 팝 문화를 소재로 작업해 온 반항적 예술가 마이크 켈리가 타계한 지 일 년 반이 지났습니다. 저는 그가 팝 문화의 키치적 요소를 다루면서도, 그에 거리 두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는 많은 토론과 기고를 해온 "침묵하지 않는 예술가"이기도 했지요.

마이크 켈리 특집으로 이뤄진 텍스테 추어 쿤스트Texte zur Kunst 3월호에 실린 이번 글은 그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맺었던 필립 카이저Philipp Kaiser(큐레이터), 요타 쾨터Jutta Koether(화가), 마틴 프린츠호른Martin Prinzhorn(미술 비평가)과 오나 로흐너Oona Lochner(미술 비평가)의 토론을 담고 있습니다. 켈리의 예술이 80년대 독일에 미친 영향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저는 서구 예술의 유입이 한국 예술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돌이켜 보았습니다.

이 네 명 중 특히 요타 쾨터의 "예술가로서 글쓰기"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80년대 독일 미술의 중심지였던 쾰른에서 음악과 팝 문화 잡지 스펙스, 예술 잡지 텍스테 추어 쿤스트, 플레쉬아트FlashArt, 아트스크리베Artscribe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고, 90년대 뉴욕으로 건너가 미국 록 밴드 소닉 유스Sonic Youth의 킴 고든Kim Gordon등과 교류하며 공동 작업을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경험 덕에 마이크 켈리가 활동하던 당시의 '독일-미국 예술계의 교류'를 생생하게 전할 수 있는 거겠죠. 현재 저는 함부르크 미대에서 그녀에게 배우고 있는데요, 퍼포먼스, 음악, 영상, 저술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왜 굳이 자신이 화가임을 강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행 : 오나 로흐너Oona Lochner / 번역: 정소현

이번 호에서 다른 글의 필자들은 무엇보다도 미국적 관점에서 마이크 켈리Mike Kelley의 작품을 조망했는데요, 저희는 독어와 영어로 된 저희 잡지 성격과 최근 편집 경향에 맞춰 문화적 관점을 확장해볼까 합니다.
켈리가 독일어권 예술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미국과 유럽 토론의 장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미국-독일 관점의 변화가 이런 논의에, 그리고 지역적-비판적 활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 이에 대해 우리는 마틴 카이저, 요타 쾨터 그리고 마틴 프린츠호른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나 로흐너: 먼저 마이크 켈리가 1990년 대 독일어권 미술계에 미친 영향에 관해 얘기해 볼까요? 당신들은 그의 작업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요타 쾨터: 마이크 켈리를 제대로 알게 된 건 1988년 뉴욕 메트로 픽쳐스Metro Pictures에서 그의 전시, "반 인간Half a Man"을 봤을 때입니다. 그는 작품, "박제 동물Stuffed Animals"을 전시했죠. 당시는 제가 아직 스펙스Spex에서 음악 외外 문화" 분야를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의 작업을 보고서는, 모두가 바로 이런 예술을 기다려 왔다는 생각이 들었죠. 예술가만이 아니라 예술과 별 관련 없는 이들에게까지도 통하는 것 말입니다. 거기엔 도발적이면서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지요. 굉장히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모순을 만들어 내고 그걸 실제 삶에 끌어들이는 태도 말입니다.
마이크 켈리, Arena #8 (Leopard), 1990, 박제 동물Stuffed Animals, afghan, 메트로 픽쳐스Metro Pictures

80년대 말, 예술에 있어 당시 쾰른이나 뉴욕의 최신 경향은 어떻게 달랐나요?

쾨터: 당시 일반적인 태도는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이었죠. 자신의 100%가 확실한 카테고리로 분류되길 바랐습니다. 독일에 이는 일종의 새로운 브랜드화, 특정한 제스처였습니다. 뉴욕에서 성공을 거둔 모든 것은 모종의 외관, 겉모습, 상품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비판적인 "픽처스 제너레이션Pictures Generation"도 그럴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마이크 켈리, 로스앤젤레스에서 방금 막 수입되어 온 이 인물은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왔습니다. 예술사나 예술 시장에서 에너지를 끌어 쓰지 않으려는 반항적 태도가 그의 기반이었죠.
저는 록 음악이든 그 어떤 문화적 활동이든 간에 이런 쪽으로 활동하는 캐릭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저 자신의 작업과 맞닿아 있기도 했고요. 저는 이를 늘 "대안 표현주의"라고 정의해 왔지요. 남들이 무얼 하던, 무엇이 유행이건 간에 개의치 않고 표현할 줄 아는 태도 말입니다. 자신 만을 주제 삼지 않고, 자신을 자신의 열정을 통해 형상화된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요. 그리고 켈리의 주제는 저 자신의 주제와 많은 부분 일치했습니다. 문화에 대한 관심, 대안적 관점의 미술사, 여성, 트랜스젠더... - "대안적" 주관성이라는 면에서 말이지요. 자신을 격렬히 표현하려는 것, 가능한 모든 사회적 저항에 함께하고 "거기에 반응해야만 하는 것"을 끝나지 않는 작업으로 보는 것, 저는 이를 "탈脫 표현주의"라 불렀지요. 더욱이 제 작업과의 연장선상에서요. 저는 당시 뉴욕에서 휘트니Whitney-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오늘날에는 어쩌면 격정적이라 부를 법한 이런 태도로 토론에 임했지요.

마틴 프린츠호른: 저는 거기에 딱히 표현주의라는 개념을 한 번도 떠올려 본 적은 없었습니다만 아주 잘 들어맞는 것 같군요. 제게도 켈리는 이 예술 활동을 확장하는 모델로서 중요했습니다. 영화나 음악같이 다른 문화 영역으로도 관심을 열어두는, 확장 모델로 말입니다. 이런 모델은 이미 80년대 후반 빈의 프란츠 웨스트Franz West와 알베르트 욀렌Albert Oehlen을 통해 꽤 조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페터 파케쉬Peter Pakesch가 마이크 켈리를 1988년 가을에 오스트리아 스타이어마르크의 그라츠로 초대했을 때,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작업의 바로 그런 부분에 흥미를 느꼈지요.
당시 저는 그라츠가 로스앤젤레스를 떠올리게 한다는 마이크의 말을 의아해했었죠. 그다음 해에야 저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호감 가는 주변성. 그는 이 오스트리아 소도시가 가진 주변성과 이로부터 연상되는 언더그라운드적 가능성을, 당시 늘 뉴욕과 뉴욕에서 협의한 주 원칙에 반反하던 로스앤젤레스에서 그가 경험한 상황과 비교했던 겁니다. 제 생각에 켈리에게는 주변부로서 국제화된 예술 논의에 대항해 예술 논의를 하려던 노력이 유럽과 미국의 관계보다 훨씬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미국이든 유럽이든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연결고리를 찾았지요.

필립 카이저: 저와 켈리의 첫 만남은 덜 직접적이었습니다. 저는 1992년 바젤 쿤스트할레 카탈로그를 샀습니다. 그 녹색의 잘 만든 카탈로그는 엄청나게 비쌌지요. 그러고 나서 저는 소닉 유스Sonic Youth에 대한 그의 작업을 다른 한 두 전시를 통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서는 제가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드디어 그를 직접 만나게 되었죠
로스앤젤레스에 관해서는, 1980년대에 변두리 상황이던 뉴욕이 언제 독립적인 장면Scene으로 발전했는가 하는 질문이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놀랍게도 이런 구조는 마이크 켈리가 연관되는 쪽으로 발전해 갔지요. 켈리가 1976년에서 1978년까지 칼아츠CalArts를 졸업한 후, 로스앤젤레스에 남기로 했을 때, LA가 출발점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물론 60년대에 이미 서부 해안에는 독립적인 예술 장면이 있었지요. 하지만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LA의 해방을 켈리의 체류와 연결지어 봅니다.

쾨터: 하지만 제 생각에는 유럽의 방식, "마이크-켈리로-합의 보기"가 그에 한몫했다는 걸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다양한 갤러리 분파들에게 피터 파케쉬Peter Pakesch나 쾰른의 라파엘 야블론카Rafael Jablonka 같은 이들이 나타나 저런 이야기를 굳힌 때가 있었습니다. 마이크 켈리를 나머지 LA로부터 꺼내온 켈리의 국제화는 당신이 말하는 이 이야기의 가장 큰 틀, 모든 일이 시작이었지요.



카이저: 맞아요. 하지만 70년대 LA의 미술 장면을 연구하다 보면, 마이크 켈리가 어떤 것에 매혹되어있었는지, 그가 어떤 것에 영향받았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퍼포먼스적인 요소가 그에게 굉장히 중요했다는 것 하나는 분명히 말 할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소품으로 연극을 만들던 가이 드 코인테트Guy de Cointet를 보면 켈리가 그의 작품을 분명 접한 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제가 암스테르담에서 스테델릭Stedelijk 전시를 봤을 때는 당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이미 크게 성공한 예술가인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린츠호른: 제가 보기에 마이크 켈리가 퍼포먼스와 연극에 미친 영향은, 어쩌면 미술에 미친 영향보다 더 결정적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그의 초기 음악-퍼포먼스를 보면 훨씬 나중에 연극에 도달하게 된 미학적 싹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호르텐지아 푈커스Hortensia Völckers같은 연극인들이 90년대에 빈의 축제 주간Festwochen의 감독이었을 때, 마이크 켈리의 작업에, 특히 그의 조잡하고 슬랩스틱적인 순간들에 굉장히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또 다른 예로, 아주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르네 폴레쉬René Pollesch에게서 마이크의 영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쾨터: 저에게 마이크 켈리는 이기 팝Iggy Pop 혹은 다른 미국 언더그라운드나 팝 문화 아이콘과 비슷한 조합에서 나온 캐릭터입니다. 마이크라는 인물은 일종의 코믹, 그 자체였지요. 물리적으로도요. 그에게 있어 무언가 "멋진"것을 보여주려고 정말로 노력한 퍼포먼스는 없었습니다. 절대 멋져 보여서는 안됐죠. 그는 그저 항상 무언가를 유발하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예술이 혹은 그의 퍼포먼스들이 유발한 것은 무엇인가요?

카이저: 저는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요타가 1994년 스펙스Spex에 마이크 켈리와 한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자기 작업이 가져온 영향에 관해 이야기하죠. 그는 아주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음악의 다른 한편에, 직접적인 면이 부족하고 지성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여겨지는 미술을 배치합니다. 그가 한 문단에 걸쳐 그의 작품의 의도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지요. 바로 시각적인 직접성에 도달하고자 한다는 얘기였는데요, 이 목표에 대한 성공여부는 중요치 않으며, 실패 또한 자기 계획의 일부라 이야기합니다.

쾨터: 맞아요.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직접성에 대한 열망은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이어지죠. 비록 그가 자신이 바라던 것과는 다른 예술가, 대형 작품 예술가가 되어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 측면만은 끝까지 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를 재현하는 데에 그의 온 힘을 쏟았지요. 생애 마지막 2년간, "모든 괴물을 파괴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규정하고 언더그라운드의 의미와 그 연결점을 작업에서, 자기 자신만의 이야기 속에서 다시 한 번 펼치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을 휩쓸었던 팝 문화, 음악 그리고 언더그라운드의 중요성이, 방금 얘기한 마이크 켈리 자신의 작업의 국제화와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걸까요? 갤러리스트의 도움으로 그의 작업을 쾰른에 전시하게 되었잖아요?


카이저: 이런 현상의 국제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기 위해서는 아마도 이쯤에서 마이크 켈리의 팝 문화와 단호한 상징적 표현 방식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이크 켈리는 독일에서의 성공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예술이 미국의 일상 문화에 꽤나 깊이 못 박고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과연 그의 작업을 독일로 가져오는 것이, 그리고 반대로 유럽인이 팝 문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실제 무엇을 뜻하는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마이크 켈리의 작업과 연관 지어, 팝 문화에 관해 유럽의 시선을 얘기할 때, 거기에 어떤 관점들이 혼재해 있는 걸까요?

카이저: 저는 폴 맥카시Paul McCarthy와 함께 한 프로젝트에서 저 자신이 어떤 카테고리에 속하는지에 대해 숙고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술가가 대중적인 작업을 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요? 그리고 또 다른 상황과 관련해 제게 떠오른 것은 미합중국의 실제 삶이나 일상생활을 둘러싼 문화가 굉장히 포스트-모던에 잠식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포스트 모던적인 전제를 체화한 로스앤젤레스 같은 도시에서는 모든 것의 공존이 과연 가능한지 그리고 팝이냐 고급문화냐,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구분 지음이 얼마나 무의미한지가 분명해집니다. 이런 질문들을 우리 유럽의 대학에서 다루기는 하지만, 우리의 일상과는 아직 동떨어진, 어쩌면 영영 도달하지 못할 것이죠.



그러면 8, 90년대 독일 예술계에서 팝 문화적인 물질을 다루는 태도는 어땠나요?

카이저: 그 질문에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이름이 있다면 물론 마틴 키펜베어거Martin Kippenberger겠지요. 그가 89/90년에 베니스와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는 게 떠오르네요. 그리고 바로 그때 마이크 켈리는 쾰른의 갤러리 야블론카Jablonka에서 전시를 했지요. 이 동시성은 변증법적인 자연의 법칙처럼 흥미로워 보입니다.

쾨터: 맞아요. 80년대에 예술적 실기는 독일에서 신표현주의를, 미국에서는 차용借用을 발생시켰지요. 마틴 키펜베어거나 마이크 켈리는 이런 흐름에 꽤 조잡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그에 반발하는 전략을 발전시켜 나갔지요. 아카데미에 반하는 그리고 가장 통속적인 단계에서 진행된 전략이었어요.
이는 마이크가 그의 술잔 수집을 예술이라 규정했던 것이나 마틴이 모든 것에 "I love" 스티커를 붙였던 것을 예로 들 수 있겠죠. 이는 방법적인, 팝 문화의 실기가 야기한 정의 혹은 차용 전략을 사용하고, 이를 완전히 뒤집어 "요란한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였죠. 80년대 말 당시 갑자기 이런 것이 두 문화 모두에서 가능했습니다.

프린츠호른: 방금 천박한 혹은 반 아카데미적이라고 얘기하신 것들이야말로 키펜베어거 뿐만 아니라 켈리에게도 엄청나게 많은 것을 끌어 쓰고, 인용 틀을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이 가능하게 해 주었죠. 1998년에는 폴 맥카시와 켈리는 빈의 쎄세지온Secession에서 멋진 전시 "Sod and Sodie Sock Camp"를 열었지요. 오늘날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때가 켈리가 맥카시보다 실은 키펜베어거에게 거의 더 가까웠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켈리가 항상 아이디어를 가지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가져온다면, 맥카시는 섬세히 정의된 재료를 쌓아올려 가지요. 모든 것을 끌어 쓰는 이런 작업 태도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가능하지 않은 토론의 기회를 연다고 봅니다.

카이저: 하지만 키펜베어거와 켈리 두 캐릭터를 그들 자신을 가지고 하는 퍼포먼스를 비교하면, 키펜베어거는 아시다시피 이를 자기 생애의 마지막까지 관철했지만 마이크 켈리는 달랐지요. 그 자신이 중심이 되었던 강한 퍼포먼스가 그의 성공의 시작점이었다면 80년대 후반, 이는 그 양태를 바꾸었죠.



여기서 요타 쾨터와 마틴 프린츠 호른께 질문 하나 드릴게요: 80년대 후반의 마이크 켈리라는 인물을 키펜베어거와 비교해 어떻게 보시나요?

프린츠호른: 둘은 서로 꽤 초창기부터 알고 있었지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 그들은 처음부터 서로 증오가 섞인 사랑의 관계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항상 눈여겨보았지요. 즉, 둘 다 서로 비슷한 프로젝트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단 얘기죠. 제 생각에 둘 사이의 주된 차이점은 키펜베어거의 초기작에 있어 회화가 굉장히 중요했으며 퍼포먼스적인 면이 점차 추가되었다면, 켈리의 경우 퍼포먼스적인 면이 - 그리고 퍼포먼스로서도 역시 -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죠. 키펜베어거의 경우 점차 퍼포먼스를 하게 되었고 또한 그의 조각 전시 "페터Peter"를 시작으로 점차 큐레이터 역할도 하게 되었죠.

쾨터: 물론, 어떤 환경에 있느냐가 퍼포먼스의 방식을 형성하지요. 마틴 키펜 베어거에 있어 처음부터 회화가 중심에 있었고 점차 다른 방식으로 확장해 나갔다는 데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그러나 둘 다 사회적 실상에 기반해 예술 제작을 한다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독일 내의 사회적 실상은 LA와 달랐고 바로 이 점이 둘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 냈죠. 칼아츠에서 공부한 마이크 켈리 같은 이는 회화를 자신의 작업의 중심으로 볼 수 없었죠. 결국, 나중에 가서는 굉장히 개념 중심, 반反 회화 출신의 다른 많은 이들처럼, 회화를 짚고 넘어가긴 했지만 말이지요.

카이저: 어쩌면 일단 이런 질문부터 던져야 할지 모르겠군요. 마이크 켈리가 갤러리 야블론카에서 첫 전시를 연 1989년 쾰른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때가 정확히 80년대에서 90년대 초로 넘어가는 때이기에 관심이 가네요. 저는 당시 그 전시를 못 봤습니다만, 마이크 켈리가 그곳에 나타나게 된 상황에 관해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쾨터: 당시는 키펜베어거의 실기가 쾰른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때였죠. 이제 지겨울 정도로 많이 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러는 동안 1989년에 굉장히 직접적인 교환이 이뤄졌죠. 즉, 아주 잘 나가던 갤러리 헤츨러Hetzler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 적절한 예술가들, 그리고 쾰른에 전시가 있어, 갑작스레 유명해진 미국 예술가들, 그뿐만 아니라 단지 물리적으로 쾰른에 살던 예술가들 사이에서 말이지요. 모두가 엄청나게 도취해 있었고 교환의 열병에 들 떠 있었습니다. 미술 시장은 아직 "해킹"되기 전이었죠. 바로 이런 굉장히 개방적인 환경에 마이크 켈리라는 인물이 등장한 겁니다. 적어도 제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 캐릭터를 굉장히 흥미롭게, 호기심에 찬 눈으로 보았죠. 저 역시 스펙스에 그에 관한 기사를 썼고요.

프린츠호른: 좋은 포인트예요. 저는 마이크 켈리의 입지가 중요해지던 초기 단계에 있어 스펙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정말 중요한 역할이었죠.

쾨터: 맞아요. 하지만 켈리는 스펙스의 경우에서도 그랬지만, 그런 예술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던 바로 그 순간 나타났지요. 독창적인 실기를, 그리고 또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하는 비판적 논쟁이라는 반성하는 측면,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독창적 강박관념에 대해 80년대 말에야 이르러 물밀듯 한 논의가 생겨났는데요, 마이크 켈리의 창작활동이 그야말로 제때에 등장했지요.

프린츠호른: 저는 이 당시 켈리가 이슈화된 것은 무엇보다도 스펙스의 논의를 통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스펙스가 1990년 대형 그룹전 "쾰른 전시The Köln Show" 카탈로그를 만들었을 때에야 쾰른 미술계는 스펙스의 논의 혹은 비판적 논의에 더 많은 비중을 실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켈리 스스로 쾰른 미술계에 발을 들인 게 아니라고 봅니다. 스펙스가, 그리고 무엇보다고 요타, 당신의 글솜씨가 이 모든 역사를 만들어 주역이라 봅니다.

쾨터: 거기에 텍스테 추어 쿤스트 또한 한몫했죠. 마이크는 텍스테 추어 쿤스트의 첫 에디치온에 참여했죠.

실제로 이 에디치온은 켈리가 예술가 페터 사울Peter Saul에 대해 수집한 메모로 구성되어 있었지요. 발표를 위한 메모였는데, 결국 켈리는 이 발표를 한 번도 하지 않았지요. 이는 우리를 어쩌면 이런 질문으로 이끄는 듯합니다: 켈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도 비슷하겠죠, 요타, 글을 쓰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요? 그는 자기 작업과 다른 이들의, 종종 친분이 있는 예술가에 관해 썼으며 동시에 늘 예술, 비판과 이론 생산의 경계에서 활동했습니다. 이 분야가 예술 활동과 연결될 때 예술 생산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나요?

쾨터: 독일에서야 그런 활동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요! 저 같은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두리번거려야 했고요. 우리가 들여다보게 된 곳은 결국 미국이었죠. 거기서 제게 가장 중요한 지인은 마이크 켈리가 아닌, 마이크의 가까운 친구였던 존 밀러John Miller였죠. 저처럼 그도 아트스크리베Artscribe에 기고를 하고 있었고 그의 글 아래에는 늘, 그가 예술가이자 예술 비평가라고 적혀 있었어요. 저는 그게 참 멋지다고 생각했지요. 드디어 누군가 예술 활동과 글쓰는 활동 둘 다를 당연히 한다고 말하는구나! 예술과 쓰는 행위가 연결되어 있으며, 이런 예술가로서 쓰기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글을 써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신선했죠. 당시 이는 금지된 것이었고 그것이 저를 불편하게 했거든요.

카이저: 이런 연관선 상에 예를 들어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과 같이 더 많은 역할 모델이 있었나요? 그리고 그에 대한 논의가 있었나요?

쾨터: 이곳에서는 그 어떤 아카데미에서도 스미슨과 그의 글 쓰는 활동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런 것은 열정적인 관심과 개인적인 연구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학습해야 했지요. 그리고 바로 그런 환경이 중요했죠. 이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펑크였습니다. DIY - do it yourself. 만약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의 독일에서, 미국 미술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예를 들어 미술 협회의 전시라든지 출판물에 대해서요, 그러면 낑낑대며 어떻게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보를 끼워 맞춰야만 했었죠. 하지만 진짜 작가, 현존하는 역할 모델이요? 그런 건 꿈도 꿀 수 없었죠! 그래서 독일식으로 해야 했구요, 그게 바로 펑크였어요. 예술가는 한편으로 항상 역사가historian이기도 하다는 얘기를 마이크 켈리와 자주 했죠. 하지만 연구자researcher (이런 분류도 당시엔 없었어요)로서만이 아니라 - 제 경우에는 - 회화를 함에도 연구하는 예술가로 남길 원했어요. 저는 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마이크는 행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이슈화시켰기 때문에 너무나도 중요했어요. 물론 저와 1989년에 페미니즘 이론에 대해 대화 나눌 만한 상대는 제 스펙스 지인들 외에 다른 어떤 예술가도 없었지요. 극단적인 상황이었죠. 당시 젊은 여성 예술가들이 가졌을 법한 이런 열망은 그런 수입물로만이 충족될 수 있었지요. 다른 이들의 성찰의 전략을 한 데 모아서야 겨우 자신을 정의 내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프린츠호른: 하지만 유럽에서도 예술에서 이론이 배제되지 않았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되겠죠. 90년대 초 이론과 자신의 예술에 대해 깊이 사유한 개념 예술 세대는 인정받아왔죠. 이에 관해 갤러리 크리스티안 나겔Christian Nagel의 크리스티안-필립 뮬러Christian-Phillip Müller와 같은 많은 예술가가 떠오르네요. 그러나 그들에게 이론은 작업을 위한 기초였을 뿐이죠. - 요타와 마이크 같은 사람들이 작업과 동일 선상에서 글을 만들어낸 것은 하나의 스캔들이었어요. 사람들은 이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몰랐지요.

켈리나 요타와는 달리, 예술가들은 오늘날까지도 점점 더 자주 이론적이나 비판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데에 있어 신경을 곤두세우지요. 그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작업에 대한 것이라면요. 지난 20년간 이에 대한 이유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카이저: 글쎄요, 거기에 변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작품을 두고 토론하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전략입니다. 덧붙여 늘 작품의 개념화에 의지해 예술 작품의 역사화가 이뤄진다고 볼 수 있죠. 예술 역사에 있어 이런 식으로, 예를 들어, 다른 미니말 작가들보다는 도널드 저드Donald Judd를 다루기가 훨씬 흥미롭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도널드 저드의 작업이 딱히 다른 작가들의 작업보다 더 흥미로운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길게 볼 때 개념화가 역사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 어떤 효과가 있는 지를 관찰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이를 켈리의 작업에 적용해서 어떻게 보시나요?

카이저: 일단은 그의 작업의 개념적인 차원이 명확해진다고 봅니다. 처음부터 켈리의 작업에 있어 언어는 높은 위상을 부여받았지요.

프린츠호른: 예술과 이론이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이 생각은 많은 부분 캘리포니아의 패서디나에서 이뤄진 마이크의 후반기 작품 활동으로 계속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학생들도 석사를 위해 이론 논문을 써야 했죠. 물론 많은 학생이 들뢰즈Deleuze에 대한 엉터리 글을 제출했지만, 몇몇 학생들이 자신의 예술과 다양한 참조 사이에 완전 놀라운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금 예술 활동에 영향을 미쳤죠.

쾨터: 켈리는 다른 작가들에 대해서 쓰고, 이 방식을 그의 학생들에게 전달하기만 하는 것을 넘어서서 가르치는 것을 확장된 예술 활동으로 보았습니다. 가르침에 있어, 혼란과 망상 그리고 인재를 유입시키고 거기에는 늘 모순, 갈등 그리고 열린 틈이 생겨난다 할지라도, 아니, 바로 그런 이유에서 저는 가르친다는 행위를 늘 굉장히 흥미롭게, 그리고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켈리의 주변에는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예술적 행위의 일부로 보는 몇몇 예술가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존 밀러, 그리고 저 또한 그중 하나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비평 문화적 도구 중 하나지요.

당신의 학생들은 당신이 학생이던 80년대보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연결된 예술 망으로 인해 훨씬 작아진 세계에서 자라났지요. 이런 것들을 통해 다양한 장소-뉴욕, 로스앤젤레스, 쾰른 혹은 오늘날에는 베를린 간의 교환 형태가 어떤 게 바뀌게 되었나요? 논의의 공간이 교차하는 정도가 많이 달라졌다든지, 접근 방식 또는 코드화의 많은 부분이 어느 정도로 낯설어지거나 구분됐다든지 하는 차이점을 느끼시나요?


카이저: 세계화 그리고 예술 공간의 확장에 따라 익숙치 않은 곳에서도 여타 지역성을 내보이는 예술적인 것들이 형상화된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적인 스타일과 지역주의의 혼합은 아직도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사랑받는 듯합니다. 동시에 예술 시스템의 확장은 극단적으로 천편일률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개방과 통일의 변증법 관계"라고 저는 지금 현재 상황을 묘사하고 싶습니다.

프린츠호른: 제 생각에도, 바로 이 지역화를 통해 시야를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젊은 작가들에게는 그들의 작업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지역적인 상황이 국제적인 발전 단계를 갈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죠. 이 모든 모더니즘적 흥분은 지역과 그의 특수화된 조건과 굉장히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즉, 예술 활동에 역사 쓰기가 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칠수록, 상황이 더욱더 특화되지요.

쾨터: 맞아요. 결국은 무언가 일괄적인 것으로부터 무언가 묘한 것strange을 찾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자기 손안에 든, 익숙한 것을 다시 낯설게 만드는 데에 노력을 쏟는 것이요. 바로 이 낯설게 만들기가 오늘날 중요한 것이죠.

공유하기 버튼

싸이월드 공감트위터페이스북
 

우리는 창의적이 되고 싶어하며 – 그래야만 한다 / 자본주의 속 예술

이번에는 창의성의 발명Die Erfindung der Kreativität이라는 책에 관한 기사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책은 나온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아 초판이 완판되었는데요, 저자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 사회학자라는 것을 고려할 때 놀라운 일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문화 사회학자 안드레아스 레크비츠Andreas Reckwitz는 그의 책을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오늘날 창의적이 되는 것, 개성을 가지고, 자아실현을 하는 것을 원치 않는 이는 없습니다.
(관련 글 : "창조적이 되라, 너를 새로 발견하라!" / 자본주의 속 예술이 갈 길) 자본주의 아래, 개인뿐 아니라 이제는 많은 기업까지 본보기로 삼는 이런 성향은 실은 60년대를 전후로 한 저항 문화가 추구하던 바와 신기하게도 일치합니다. 어떻게 저항 문화의 지향점이 그가 비판하던 자본주의의 신조가 된 걸까요? 예술가가 자본주의 시대에 모두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점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늘 새로움을 추구하여 주류에 저항하는데도 말이지요. 레크비츠는 이런 이유로 예술가가 최고의 자본주의자라 말합니다. 오늘날의 사업가들은 예술가가 되고자 합니다. 물론, 레크비츠의 이런 고찰은 예술계를 자극했고 주요한 미술 매체에서는 이에 대한 많은 논쟁과 토론이 있었습니다. 제 주변의 친구들 역시 이 문제를 다룬 전시를 "창의성의 해체Kreativität abrüsten"라는 제목 아래 계획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 첨부)

진보 성향 주간 신문 디 차이트Die Zeit 2월 18일 자에 인문, 철학부 편집장이자, 철학자 하버마스의 제자인 토마스 아스허이어Thomas Assheuer가 쓴 기사를 소개합니다.


글: 토마스 아스허이어Thomas Assheuer / 번역 : 정소현

안드레아스 레크비츠의 인상적인 연구: "창조성의 발명Die Erfindung der Kreativität"에 대해

사회 비평을 하기에 좋은 시대가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회 비평을 하면 마치 술에 물을 타 술자리의 흥을 깨는 사람, 전후 독일 시대에서 온, 한물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런 시대는 지나갔다. 서점에 가 조금만 둘러보면 비평적인 이론서들에 바로 둘러싸이게 된다.

좋은 예로 프랑크푸르트(오더)에서 교단에 서는 문화·사회학자 안드레아스 레크비츠Andreas Reckwitz를 들 수 있다. 몇 년 전 그는 하이브리드 주체Das hybride Subjekt에 대해 자극적이고 꽤 특이한 한 책을 썼다. 우리는 이미 이때부터 레크비츠의 글쓰기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레크비츠는 "시스템 광신도"라고 무시당하던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이론 구조로부터 비평적인 힘을 끌어내고 다른 사유 모델과 연결했다. 또한, 레크비츠는 유토피아적인 안전망이나 메타포의 도움 없이 작업한다. 그가 시대에 내리는 진단, 그리고 이를 통해 생겨난 재빠르고 차가운 톤의 글쓰기는 다른 비평문들과 달리 뚜렷한 결론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그는 더 나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는 세계가 아주 다른 모습을 할 수 있었음에도 결국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보며 놀라워할 뿐이다.

새 책에서 레크비츠는 "창의성"의 성공에 대해 놀라워한다. 자세히 말해, 창의성의 성공이 얼마나 빠르게 사회의 이상향이, "요구 사양"이 되었는지에 그는 매료되었다. 안내 창구 직원, 영화관 검표원, 감자튀김 판매원 – 이들 모두는 창의적이어야 한다. 이에 성공하지 못할 때, 이는 그들 자신의 책임이라고들 한다. 창의성은 "후기 모더니즘"의 이상향, 비밀스러운 성공의 재료 그리고 자본주의의 기괴한 욕망이다. 레크비츠의 다소 가파른 개념 설정에 따르면, 미학적 창의성은 주체와 시스템을 연결하기에 오늘날의 사회화 방식이라 한다.
요하네스 벤줄라Johannes Bendzulla, 무제, 갤러리 BRD, 쾨피스 뢰플러Korpys/Löffler, 토마스 데만드Thomas Demand, 슈테펜 칠리히Steffen Zillig가 함께 하는 전시 창의성 해체Kreativität abrüsten에 전시되는 작품 중 하나로 사진 시리즈를 모은 사진집입니다. 책은 앞과 뒤 양쪽에서 시작하며 각각 예술가와 기업가의 사진을 수집, 수정하였습니다.


그의 연구 제목은 창의성의 발명이다. 이 온순해 보이는 제목은 그 자신의 실체를 완전히 위장한다. 레크비츠는 도입부에서부터 시민 문화의 기둥을 무너뜨린다. 그는 예술이 "더는 사회에서 주변부를 맴도는 외적 문화가 아닌", 사회의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와해된 자본주의" 속에서 예술과 자본의 묵은 대립은 사라진 듯하다 – 그리고 미학적-창조적인 성향은 기업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미학적"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경계를 없애고" 이제는 모든 곳에서 관찰된다. 병따개, 휴대전화 혹은 스타일리쉬한 도시를 달리는 오프로드 차량이든 간에, 자본주의 세상에서 이것들은 더는 표준화된 상품이 아니다. 이는 소비자의 감성이 투사되고 자신만의 삶의 방식에 창조적으로 들여오게 되는, 미학적으로 혁신적인, 창의적으로 발명한 상품이다. 과거에 거의 종교의 자리에 올라있던 예술이 감춰진 진실을 작품에 드러내려 했다면, 오늘날 자본주의적 창조 미학은 의미 없는 "격정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오늘날 미학은 작품이 아닌 현상을 만들어낸다 – 그들은 매력적인 것을 더욱더 매력적으로 만들어내고, 반복되는 자극, 흡입력과 감성을 생산해 낸다. 이런 넘치는 발명들은 레크비츠에게 "태생적으로" 감정이 없는 자본주의가 그렇게나 많은 매력을 펼쳐 보이는 이유를 알려준다: 자본주의는 더는 의무가 아니며, 더는 막스 베버Max Weber 형식주의의 노예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감각적으로-의욕에 찬 비전이다. 그 누구든 언제든지 격정-세계에 입장해 창조적으로 참여하면 된다. "차갑게 식은 모더니즘 시스템의 바다에서 예술은 뜨거운 열대의 군도群島이다."

사회 전체가 미학적으로 달궈진다면, 혹은 레크비츠가 쓰고 있듯이 "창조적 전략Kreativitätsdispositiv"이 승리했을 때, 예술가의 역할은 변화한다. 시민 문화에서 그는 천재적인 별종이었다; 오늘날 예술가는 창조의 전형을 사회의 중심에 내리 꽂고 "자기 자신의 육체에" 지당한, 유명세를 노리는 유명한 스타다. 이와 동시에 그는 "특별한 존재로의 아우라"를 잃긴 하지만 매력적인 이상적-자아Ideal-Ich에 승선한다: 스타 예술가는 피곤에 지친 시민에게 어떻게 자신을 스스로 창조적으로 마케팅 해 사회 복지 구조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남는지를 보여준다.



이상하다: 우리가 아는 전설은 현대 미술이 반 자본주의에 깊이 물들었다고 하지 않던가? 레크비츠는 맞는 말이다, 라고 쓴다. 그러나 바로 그 자본주의 비판적이라는 반문화가 과거 예술과 자본의 장미 전쟁을 끝낼 만반의 준비를 도맡았다고 한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예술을 그의 시민-종교적인 배경으로부터 오려내, 그를 – l’art pour l’art –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미학으로 만들었다. 쓰디쓴 아이러니: 이 덕에 이제 "순수하게" 그리고 자유로워진 미학적 에너지는 낯선 목적으로 쓰이기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광고, 패션, 디자인 분야가 그랬다. 레크비츠는 60년대의 반문화 성향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계기를 본다. 이는 반문화로 부터 떨어져 나와 미학적 자본주의의 모범적 최고 회사가 된 창조적 산업인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당장에라도 미학적으로 만들어 낼 준비"를 위한 전환점이다.

레크비츠가 창조적 사회를 보이지 않는 폭정暴政으로, 새로운 지배자로 묘사하려는 것은 아니다. 창의성은 단지 내면 가장 깊이 있는 소망을, 진정한 욕망을 "자극한다"는 이유 하나로 후기 모더니즘의 히트가 되었다: 사람들은 창의적이 되고 싶어하고 자신의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고자 한다. 예전 사람들은 이런 이들을 전체 그룹에서 눈 밖에 나는 사람들로 여겼을 것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에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사람이 오히려 혁신적으로 보일 정도다. 레크비츠는 약간은 절망이 묻어나오는 톤으로 말한다. 창의성이라는 극단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은, 사회적 규범과는 구별되면서도 모범이 되게 한다. 사회적인 기대와 각자의 욕구는 하나가 된다. "우리는 창의적이 되고 싶어하며 – 그래야만 한다."

레크비츠가 얼마나 고집스레 "후기 모더니즘"에 대해 말하는지가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그는 정말 진지하다. 후기 모더니즘은 레크비츠에게 늙은 모더니즘이 그의 발전에 대한 약속을 파기하고 미학적 자본주의가 승리했음을 뜻한다 – 미학적 자본주의는 모든 모순의 위험을 제거하고 이 "창의적"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  이 시스템에 탈출구는 없다, 샛길로 빠지는 것만이 허용될 뿐, 이조차도 결국 거대 시스템에 속한다. 레크비츠는 이 작은 길, "비종교적인, 현실적인 창의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즉, 상업적으로 이용당하는데 저항하는, 이를테면: 도시 어딘가에 정원 만들기 ("게릴라 정원 만들기"), 청소년 시설을 세우거나 (함께) 연극 혹은 (홀로) 음악 하기와 같은 활동 같은 것들 말이다. 이 "현실적인 창의성"이 누군가에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이 창의성은 자신의 적인 게으름을 편히 대할 수 있다. 밖에서 후기 모더니즘이 발랄하게 그리고 후기 모던의 계속되는 자기 발전을 위해 창조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동안, 현실적인 창의성은 삶을 그저 "있는 그대로" 둘 수 있다.

공유하기 버튼

싸이월드 공감트위터페이스북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