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전시된다면? / 라이브 아트

무언가를 태우거나 부수는 예술가, 이러한 현장을 생생히 기록하기 위해 분주한 카메라 맨 그리고 그들을 촘촘히 둘러싸고 숨죽이며 지켜보는 관객들은 흔히들 퍼포먼스 아트 하면 떠오르는 장면일 것입니다. 기존의 퍼포먼스는 주로 작가 스스로 행위자Performer가 되고, 전시 오프닝과 같은 특정 시간에 일시적으로 퍼포먼스를 함으로써 "현재 성과 장소 특정성"을 강조하여 영상 미술Video Art과 차별성을 두고자 했으나 정작 미술관에 전시될 때는 결국 영상 기록의 형식으로 보여지곤 했습니다. 이런 기존 퍼포먼스의 시공간적 제한성에 반하는 시도가 얼마 전 에센의 폴크방Folkwang 미술관에서 있었습니다. 클라우스 비센바흐Klaus Biesenbach와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Hans-Ulrich Obrist가 기획한 전시 12 Rooms가 바로 그것입니다.

전시장에는 약 5m²에 달하는 12개의 방이 있고 각 방에는 참여 작가의 지시에 따라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배우들이 있었습니다. 보통의 전시장이라면 DVD 플레이어와 모니터 등의 기계를 통해 반복 재생될 퍼포먼스 기록 영상의 자리를 이번 전시12 Rooms에서는 배우로 대체되었습니다. 기계적 반복이긴 했지만,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배우들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단 점에서 흥미로운 시도가 돋보였습니다. 조안 조나스Joan Jonas의 전설적인 퍼포먼스, 거울 체크Mirror Check(1970)[1]를 이번 전시에서 실제로 볼 수 있었는데요, 이는 분명 1970년 당시 기록된 영상을 보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배우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우연히 교차한 순간에는 미묘한 민망함과 동시에 긴장감이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현장성이 아마도 퍼포먼스만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작가와 작품으로 2011년에 맨체스터에서 11 Rooms라는 전시가 있었고, 2013년에는 13 Rooms라는 전시가 시드니에 있을 거라는 점은 다른 한편으로 이 새로운 경향이 너무 "완성된 상품으로서의 전시와 작품"을 향해 가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상품성을 갖지 못한다고 여겨지던 퍼포먼스를 이런 방식으로 전시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기사에서는 전시를 충실히 요약하는 한편, 전시된 장애인에 대해 도덕적 질문을 던집니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8월 21일 자에 실린 기사를 소개합니다.

글 : 안체 슈탈Antje Stahl / 번역 : 정소현

루어 트리엔날레Ruhr Triennale의 일환으로 에센의 폴크방Folkwang 미술관[링크]에서는 일주일간 라이브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 양식을 소개한다

인간은 자기 주변의 혼동을 정리하고 싶으면 분류하기 시작한다: 버릴 건 버리고 정리함을 마련해 라벨을 써 붙이고 그에 맞는 물건을 집어넣는다. 이런 정리의 장점은 그가 필요한 물건을 어디서 찾을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다. 단점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이 깔끔히 포장되어 한 개의 정리함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주의하지 않으면, 그것은 거기서 잊혀진다.

이와 같은 방식은 에센의 폴크방 미술관이 보여주듯 예술 분야에서도 통한다. 이곳에는 방 크기만한 열두 예술가의 열두 상자가 있다; 큐레이터 클라우스 비센바흐Klaus Biesenbach와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Hans-Ulrich Obrist는 이를 "열두 개의 방"이라 부른다.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상자들.
12 Rooms, 마리나 아브라모빅의 Luminosity(1997). 3미터 정도의 높이에 벗은 몸으로 벽에 걸려 있는 배우는 사각형으로 비치는 조명 덕에 더욱더 성화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모티브를 떠올리게 한다. 방문객 한명 한명과 긴 시간 동안 눈을 맞추는 그녀의 시선은, 마치 '바로 당신, 당신이 나를 못 박았다'라고 말하는 듯 하다. 사진: Heiko Klaas

이런 상자 같은 방에 조각이 아닌, 발가벗은 살아 숨 쉬는 여자가 들어있다. 그녀는 손에 거울을 들고 그녀의 몸을 탐색한다. 또 다른 방에는 다른 여자가 벽에 걸려 있다. 약간은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 걸린 모양새로 말이다. 다른 점이라면 못 박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 그녀는 벽에 박힌 좁은 널빤지 위에 걸터앉아 사방으로 뻗은 사지로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다.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방에는 다운증우군 장애인이 무방비 상태로, 조용히 어두운 구석에 누워있다. 또 다른 방에는 퇴역 군인이 구석에서 벽을 응시하고 있고 다른 방에서는 한 학생이 선탠 캡슐에 익어져서는 이어폰으로 외국어를 배우고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예술 작품이다.

얼마 전 새로 나온 책 "인공 지옥Artificial Hells"에서 미술 비평가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은 행위 예술과 조형 예술의 경계를 파괴하는 예술 형태의 미술사를 추적한다. 거의 백여 년 전부터 예술가는 전시 오브제, 예술가 그리고 관객 사이의 전통적 차이를 좁히려는 시도를 해왔다. 에센 전시에 균형을 잡는 여성 예수를 출품한 마리나 아브라모빅Marina Abramovic은 1974년까지만 해도 그 자신을 전시하였다. 책상 위에는 가위 채찍 그리고 권총이 놓여있어 관객들이 이 사물들을 집어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여섯 시간의 퍼포먼스 동안 그들은 아브라모빅의 옷을 자르고, 반나체가 된 그녀를 전시장에 끌고 다니고, 상처 입히고 장전된 권총을 그녀의 머리에 겨눴다. 1971년 스텐퍼드 대학에서 시행된 감옥-실험의 변형된 버전처럼 들리는 이 퍼포먼스는 심리적 억압을 위한 죄수 사이의 실험 못지않은 긴박감을 예술에도 가져다주었다: 오브제처럼 행동하는 인간은 오브제로 취급된다.

비슷하게 불안정한 상황을 90년대 이후 또 다른 한 명의 예술가 역시 에센에서 연출해 낸다. 산티아고 시에라Santiago Sierra. 다른 조건에서 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는 작가 자신, 즉, 본인의 몸이 아닌, 이민자, 창녀, 또는 퇴역병을 고용했다. 그들은 최소한의 보수를 받고 상자 속에, 트렁크에 들어가고, 삭발이나 문신을 당하거나 - 폴크방 미술관에서와 같이 - 방구석에 서서 벽을 응시하라는 명을 받는다. 이 미술관에서 방문자는 미학적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인간에게 부과된 일종의 고통을 목격하게 된다. 비평가는 이 부분에서 시에라를 날카롭게 공격한다: 전시된 인간은 여기서 마치 자판기의 버튼을 누르듯, 냉소적인 방식으로 그의 존엄까지 전시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관심을 끌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미화된 고통 같은, 일종의 항변인 예술을 말이다. 또 다른 비평에 따르면, 미술관이 세상에 있지도 않은 고통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라 한다. 그저 우리가 지나쳐 왔을 뿐. 비평은 삶과 예술, 윤리와 미학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이번 전시 12 rooms에서 무릎 꿇어 라우라 리마Laura Lima의 Men = flesh, Women = flesh(1997)를 보고 있는 관객들, 그들이 들여다보는 "전시된 장애인"은 어둠 속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Heiko Klaas

폴크방 미술관에서도 이런 모순이 드러난다. 여기서 다루는 문제는 결국, 계약 퍼포먼스, 예술가에게 특정 행위를 할 것을 요구받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개개인이다. 다운증후군이 있는 소녀를 마치 전시물처럼 전시하는 것은 괜찮은 걸까?; 큐레이터에게는 배우가 기괴한 자세로 기둥에 기대어 자기 자신을 의식적으로 살아있는 그림Ta­b­leau vivant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장애가 있는 사람이 구경꾼의 시선에 방치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가?; "인간 기형을 그저 오브제로 만들어 버리는" 인간 구경이라는 못된 전통의 미미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가? 형사법에서 금지하고 있듯이 말이다. "장애를 가진 이는 어떻게 느낄까요?" 한 방문객이 묻는다. "이런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말이죠." 장애인이 무대에 오르는 것에 대해 해방이라는 행복을 위한 행위인지 혹은 기괴한 미학이라는 이름 하에 비인간적인 그의 장애를 전시하는 행위인지 크리스토프 슐링엔지프Christoph Schlingensief의 연극에서 이미 이런 질문은 던져진 바 있다.

이런 논의 너머에 움직이고 말하고 느끼고 화내고 일하는 사람이 전시되는 것에 관한 분류가 미술관에 생겨났다. 요즘 "라이브 아트"라고 불리는 이 영역에는 마리나 아브라모빅,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티노 세갈Tino Sehgal 혹은 시몬 후지와라Simon Fujiwara 같은 다양한 예술가들이 분류될 수 있다. 행위자들의 헌신 외에도 예술가들이 일종의 글을 쓴다는 것, 재연할 수 있도록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글로 적어 둔다는 점도 그 특성으로 꼽을 수 있다. 이런 상자-상황은 이미 지난 몇 년 전 맨체스터에서 체험해 볼 수 있었다. 2011년에 이 단체전은 "11개의 방"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고, 2013년에는 그에 맞는 "13개의 방"을 가지고 시드니에 전시가 있을 예정이다. 큐레이터와 예술가는 이름 하여 "라이브 아트"를 운송하고, 문서화하고 임의의 시간에 창고에서 꺼내오는 것 등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에 계속해서 공연될 수 있는 악보, 한 작품이 있다. 이는 예술 시장에 흥미로울 수도 있는 부분이다 - 이제는 삶 자체를 수집할 수 있다. 악보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연극에서, 말하자면 삶이 양식인 그곳에서는 이미 불안이 사라진 지 오래다. 발가벗은 몸덩이는 표현 양식이 되어버렸고, 이런 양식이 반드시 작품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피곤해한다: 어휴, 또 저항 타령이군. 여기에 예술은 한 가지를 보탠다 - 배우 대신 장애인까지 쓰는 것이다. 여기로부터 나오는 도덕적 문제는 "라이브아트"라는 예술 장르 전체의 질까지도 끌어내릴 수도 있다: 시에라의 무거운 분위기의 미학 화는 장난스러운 티노 세갈의 안무와 거의 연관이 없고, 이 전시에서 진짜 몸을 통한 말 걸기와 대면하기라는 놀라운 경험, 미술관을 자신의 삶의 무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전시된 장애인에 대해 놀라는 것과 별 연관이 없다. 라이브 아트는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대강 분류 상자에 정리해 넣은 개념인지 모른다. 이는 다른 말로는: 이 전시의 많은 부분은 작품이 분류된 그 개념보다 낫다는 말이다.

12 Rooms. Live Art. 루어 트리엔날레, 폴크방 미술관, 에센, 8월 26일까지.

[1] 조안 조나스Joan Jonas의 거울 체크Mirror Check(1970)는 70년대 작가 자신이 관객 앞에서 자기의 벗은 몸을 손거울로 스캔하듯 훑어 보는 작업에서 작가의 거울을 통한 시선, 자신을 관찰하는 작가를 관찰하는 관객의 시선은 작업의 중심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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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 Posted on April 16, 2013 by 4middle2 curiosity by Heiko Klaas * 원문은 KUNST/SLASH : http://kunstslash.egloos.com/1244970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글 : 안체 슈탈Antje Stahl / 번역 : 정소현 ————&#8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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