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창의적이 되고 싶어하며 – 그래야만 한다 / 자본주의 속 예술

이번에는 창의성의 발명Die Erfindung der Kreativität이라는 책에 관한 기사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책은 나온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아 초판이 완판되었는데요, 저자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 사회학자라는 것을 고려할 때 놀라운 일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문화 사회학자 안드레아스 레크비츠Andreas Reckwitz는 그의 책을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오늘날 창의적이 되는 것, 개성을 가지고, 자아실현을 하는 것을 원치 않는 이는 없습니다.
(관련 글 : "창조적이 되라, 너를 새로 발견하라!" / 자본주의 속 예술이 갈 길) 자본주의 아래, 개인뿐 아니라 이제는 많은 기업까지 본보기로 삼는 이런 성향은 실은 60년대를 전후로 한 저항 문화가 추구하던 바와 신기하게도 일치합니다. 어떻게 저항 문화의 지향점이 그가 비판하던 자본주의의 신조가 된 걸까요? 예술가가 자본주의 시대에 모두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점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늘 새로움을 추구하여 주류에 저항하는데도 말이지요. 레크비츠는 이런 이유로 예술가가 최고의 자본주의자라 말합니다. 오늘날의 사업가들은 예술가가 되고자 합니다. 물론, 레크비츠의 이런 고찰은 예술계를 자극했고 주요한 미술 매체에서는 이에 대한 많은 논쟁과 토론이 있었습니다. 제 주변의 친구들 역시 이 문제를 다룬 전시를 "창의성의 해체Kreativität abrüsten"라는 제목 아래 계획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 첨부)

진보 성향 주간 신문 디 차이트Die Zeit 2월 18일 자에 인문, 철학부 편집장이자, 철학자 하버마스의 제자인 토마스 아스허이어Thomas Assheuer가 쓴 기사를 소개합니다.


글: 토마스 아스허이어Thomas Assheuer / 번역 : 정소현

안드레아스 레크비츠의 인상적인 연구: "창조성의 발명Die Erfindung der Kreativität"에 대해

사회 비평을 하기에 좋은 시대가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회 비평을 하면 마치 술에 물을 타 술자리의 흥을 깨는 사람, 전후 독일 시대에서 온, 한물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런 시대는 지나갔다. 서점에 가 조금만 둘러보면 비평적인 이론서들에 바로 둘러싸이게 된다.

좋은 예로 프랑크푸르트(오더)에서 교단에 서는 문화·사회학자 안드레아스 레크비츠Andreas Reckwitz를 들 수 있다. 몇 년 전 그는 하이브리드 주체Das hybride Subjekt에 대해 자극적이고 꽤 특이한 한 책을 썼다. 우리는 이미 이때부터 레크비츠의 글쓰기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레크비츠는 "시스템 광신도"라고 무시당하던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이론 구조로부터 비평적인 힘을 끌어내고 다른 사유 모델과 연결했다. 또한, 레크비츠는 유토피아적인 안전망이나 메타포의 도움 없이 작업한다. 그가 시대에 내리는 진단, 그리고 이를 통해 생겨난 재빠르고 차가운 톤의 글쓰기는 다른 비평문들과 달리 뚜렷한 결론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그는 더 나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는 세계가 아주 다른 모습을 할 수 있었음에도 결국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보며 놀라워할 뿐이다.

새 책에서 레크비츠는 "창의성"의 성공에 대해 놀라워한다. 자세히 말해, 창의성의 성공이 얼마나 빠르게 사회의 이상향이, "요구 사양"이 되었는지에 그는 매료되었다. 안내 창구 직원, 영화관 검표원, 감자튀김 판매원 – 이들 모두는 창의적이어야 한다. 이에 성공하지 못할 때, 이는 그들 자신의 책임이라고들 한다. 창의성은 "후기 모더니즘"의 이상향, 비밀스러운 성공의 재료 그리고 자본주의의 기괴한 욕망이다. 레크비츠의 다소 가파른 개념 설정에 따르면, 미학적 창의성은 주체와 시스템을 연결하기에 오늘날의 사회화 방식이라 한다.
요하네스 벤줄라Johannes Bendzulla, 무제, 갤러리 BRD, 쾨피스 뢰플러Korpys/Löffler, 토마스 데만드Thomas Demand, 슈테펜 칠리히Steffen Zillig가 함께 하는 전시 창의성 해체Kreativität abrüsten에 전시되는 작품 중 하나로 사진 시리즈를 모은 사진집입니다. 책은 앞과 뒤 양쪽에서 시작하며 각각 예술가와 기업가의 사진을 수집, 수정하였습니다.


그의 연구 제목은 창의성의 발명이다. 이 온순해 보이는 제목은 그 자신의 실체를 완전히 위장한다. 레크비츠는 도입부에서부터 시민 문화의 기둥을 무너뜨린다. 그는 예술이 "더는 사회에서 주변부를 맴도는 외적 문화가 아닌", 사회의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와해된 자본주의" 속에서 예술과 자본의 묵은 대립은 사라진 듯하다 – 그리고 미학적-창조적인 성향은 기업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미학적"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경계를 없애고" 이제는 모든 곳에서 관찰된다. 병따개, 휴대전화 혹은 스타일리쉬한 도시를 달리는 오프로드 차량이든 간에, 자본주의 세상에서 이것들은 더는 표준화된 상품이 아니다. 이는 소비자의 감성이 투사되고 자신만의 삶의 방식에 창조적으로 들여오게 되는, 미학적으로 혁신적인, 창의적으로 발명한 상품이다. 과거에 거의 종교의 자리에 올라있던 예술이 감춰진 진실을 작품에 드러내려 했다면, 오늘날 자본주의적 창조 미학은 의미 없는 "격정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오늘날 미학은 작품이 아닌 현상을 만들어낸다 – 그들은 매력적인 것을 더욱더 매력적으로 만들어내고, 반복되는 자극, 흡입력과 감성을 생산해 낸다. 이런 넘치는 발명들은 레크비츠에게 "태생적으로" 감정이 없는 자본주의가 그렇게나 많은 매력을 펼쳐 보이는 이유를 알려준다: 자본주의는 더는 의무가 아니며, 더는 막스 베버Max Weber 형식주의의 노예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감각적으로-의욕에 찬 비전이다. 그 누구든 언제든지 격정-세계에 입장해 창조적으로 참여하면 된다. "차갑게 식은 모더니즘 시스템의 바다에서 예술은 뜨거운 열대의 군도群島이다."

사회 전체가 미학적으로 달궈진다면, 혹은 레크비츠가 쓰고 있듯이 "창조적 전략Kreativitätsdispositiv"이 승리했을 때, 예술가의 역할은 변화한다. 시민 문화에서 그는 천재적인 별종이었다; 오늘날 예술가는 창조의 전형을 사회의 중심에 내리 꽂고 "자기 자신의 육체에" 지당한, 유명세를 노리는 유명한 스타다. 이와 동시에 그는 "특별한 존재로의 아우라"를 잃긴 하지만 매력적인 이상적-자아Ideal-Ich에 승선한다: 스타 예술가는 피곤에 지친 시민에게 어떻게 자신을 스스로 창조적으로 마케팅 해 사회 복지 구조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남는지를 보여준다.



이상하다: 우리가 아는 전설은 현대 미술이 반 자본주의에 깊이 물들었다고 하지 않던가? 레크비츠는 맞는 말이다, 라고 쓴다. 그러나 바로 그 자본주의 비판적이라는 반문화가 과거 예술과 자본의 장미 전쟁을 끝낼 만반의 준비를 도맡았다고 한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예술을 그의 시민-종교적인 배경으로부터 오려내, 그를 – l’art pour l’art –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미학으로 만들었다. 쓰디쓴 아이러니: 이 덕에 이제 "순수하게" 그리고 자유로워진 미학적 에너지는 낯선 목적으로 쓰이기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광고, 패션, 디자인 분야가 그랬다. 레크비츠는 60년대의 반문화 성향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계기를 본다. 이는 반문화로 부터 떨어져 나와 미학적 자본주의의 모범적 최고 회사가 된 창조적 산업인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당장에라도 미학적으로 만들어 낼 준비"를 위한 전환점이다.

레크비츠가 창조적 사회를 보이지 않는 폭정暴政으로, 새로운 지배자로 묘사하려는 것은 아니다. 창의성은 단지 내면 가장 깊이 있는 소망을, 진정한 욕망을 "자극한다"는 이유 하나로 후기 모더니즘의 히트가 되었다: 사람들은 창의적이 되고 싶어하고 자신의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고자 한다. 예전 사람들은 이런 이들을 전체 그룹에서 눈 밖에 나는 사람들로 여겼을 것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에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사람이 오히려 혁신적으로 보일 정도다. 레크비츠는 약간은 절망이 묻어나오는 톤으로 말한다. 창의성이라는 극단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은, 사회적 규범과는 구별되면서도 모범이 되게 한다. 사회적인 기대와 각자의 욕구는 하나가 된다. "우리는 창의적이 되고 싶어하며 – 그래야만 한다."

레크비츠가 얼마나 고집스레 "후기 모더니즘"에 대해 말하는지가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그는 정말 진지하다. 후기 모더니즘은 레크비츠에게 늙은 모더니즘이 그의 발전에 대한 약속을 파기하고 미학적 자본주의가 승리했음을 뜻한다 – 미학적 자본주의는 모든 모순의 위험을 제거하고 이 "창의적"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  이 시스템에 탈출구는 없다, 샛길로 빠지는 것만이 허용될 뿐, 이조차도 결국 거대 시스템에 속한다. 레크비츠는 이 작은 길, "비종교적인, 현실적인 창의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즉, 상업적으로 이용당하는데 저항하는, 이를테면: 도시 어딘가에 정원 만들기 ("게릴라 정원 만들기"), 청소년 시설을 세우거나 (함께) 연극 혹은 (홀로) 음악 하기와 같은 활동 같은 것들 말이다. 이 "현실적인 창의성"이 누군가에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이 창의성은 자신의 적인 게으름을 편히 대할 수 있다. 밖에서 후기 모더니즘이 발랄하게 그리고 후기 모던의 계속되는 자기 발전을 위해 창조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동안, 현실적인 창의성은 삶을 그저 "있는 그대로" 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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