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미술의 한계 / 시프리언 가야의 맥주 피라미드

대부분의 전시가 목요일날 오픈하는 데서 따온 이름을 가진 온라인 전시 비평 사이트 donnerstag-blog.com에 2011년 5월 16일에 실린 에릭 슈타인Erik Stein의 비판적인 글입니다.(에릭 슈타인의 다른 글 보러가기) 지난 4,5월 베를린 KW에서 있었던 시프리언 가야의 전시에 대해, 미술관이라는 허울 위에 쌓아올린 낙천적이고 속이 빈 관객참여미술임을 중점적으로 비평하고 있습니다.

글 : 에릭 슈타인Erik Stein / 번역 : 정소현

참여미술의 한계

관객의 참여가 다시 한번 뜨거운 논쟁의 도마에 오른 것은 랑시에르에 의해 부활한 관계주의 미학 때문만은 아니다. 티노세갈Tino Seghal의 구겐하임 전시, 마리나 아브라모빅Marina Abramović의 모마에서의 전시같은 다양한 대형전시들이 이미 2010년부터 이 논쟁의 기반을 마련해 왔다. 그리고 2011년 베를린 KW에 전시 된 시프리안 가야Cyprien Gaillard의 맥주피라미드는 현재 굉장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사진기자에게 그의 전시 초반과 후반의 사진 비교는 시선을 끌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문화부 기자에게는 관객들이 맥주를 마심으로써 예술이 "관객의 소비"를 통해 스스로를 천천히 분해시키게 두는 것에 대해 쓰는 것 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 그의 쓰임을 통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하나의 작품.

이 작품에 대한 사회 문화적 해석으로의 인도는 이미 전시장에 놓인 보도자료의 친절한 추천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관객과 작품이 만나기도 전에 말이다. 전시장에 놓인 텍스트에는 "시프리언 가야는 작업에서 디스토피아적인 건축물과 남겨진 유적의 부조리한 측면을 끊임없이 연구한다."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서 이미 발화점으로서의 "유적"이라는 단어는 틀에 밖힌 표현이다 . 즉, 그 단어에는 망가져가는 피라미드라는 그림 하나가 역사적 문화적 건축물을 대표할수 있다는 생각이 담겨있다. 피라미드 형태 외에도 작품 내의 유일한, 또 클래식한 징후로 작가가 원하는 해석의 방향을 알아보기에 맥주의 상표 'Efes'는 이름은 고대의 Ephesos(역주:아시아 대륙에 있던 고대 그리스의 도시)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의도된 것이건 아니건 간에, 상징으로서의 이벤트를 위한 예술장사는 자연스레 반 정도 마셔 비워진 예술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서 잠시 그의 전시에 대해서 상기시키자면  프랑스 출신의 예술가 시프리언 가야는 그의 개인전 "발견의 재발견The Recovery of Discovery"를 위해 'Efes'라는 이름의 맥주 7200병을 터키로부터 주문하고, 포장된 상자째로 KW의 전시장 한가운데로 보내 위풍당당한 파란 색의 피라미드를 짓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방문자들에게 자유롭게 이것을 "사용하길" 주문했다. 얼마나 많은 비디오 클립이 인터넷에 올려지게 됐는지를 보면, 그가 이 부탁을 오프닝날 관객들에게 두번 말할 필요 없이 관객들은 알아서 열심히 맥주를 마셔주었음을 알 수 있다. 보도자료 발췌한 "그 예술작품의 정상에 오르는 것이 마치 맥주를 마시는 행위인 것처럼 - 작품을 사용함으로서, 문화재의 파괴가 진행될 것이다."라는 글은, 결국 예언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런 제도적 기관들의 예언은 다른 한편으로는 "조각이 가진 형태를 적극적으로 무시하는 공개적인 기억상실"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른 문화재를 가지고 노는 행위"가 담긴 관객에 의해 기록된 비디오 클립을 통해 증명된다.

60년대 참여미술의 개척자중 한 명인 프란쯔 에어하드 발터Franz Erhard Walther는 당시 그의 오브제에 대한 사용자의 반응이 거의 천편일률적인데 대해 실망을 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롭게 얻은 자유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순종적으로 반응했다. 발터는 그런 현상에 대해 참여자들이"환타지, 상상력, 결정권, 즉흥성을 [...] 그저 굉장히 조심스레 다루었 [...] "다고 설명했다. (W.울리히Ullrich "예술을 찾습니다Gesucht: Kunst!"중 에서) 다시 가이야의 전시로 돌아와서, 가이야가 제공한 뭔가 중요한 게 빠진"즉흥과제"를 그의 전시 상황과 비교해 이해해 본다면, 그는 실은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최소한, KW의 대표인 가브리엘레 호른Gabrielle Horn의 말에 따르면 5월 3일 맥주를 마시는 대신 빈 병을 정리하고 깨진 유리를 쓸어 담고 찢어진 상자를 따로 모아진 쓰레기 더미에 던진-즉, 정리하기 시작한 이 다섯 명의 전시 방문객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시프리언 가야의 발견의 재발견The Recovery of Discovery,12 x 8 x 4,25 m, 2011:  KW 홈페이지에 올려진 시프리언 가야의 전시 오픈 전 모습, 사진: 우베 발터Uwe Walter

다섯 명의 방문자들이 이 참여작업의 한계에 대해서 설교하는 듯한 처음 한시간 동안, 흥분한 KW 전시지킴이들은 도전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그 방문객들에게 맥주 상자로 다시금 대칭의 피라미드 형태를 만드는 것과 같은, 작업의 근본적인 컨셉에 도전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찌되었든, 이 전시장을 치우는 것은 전시가 끝나고 서도 할수 있는 일이다. 몇번의 대화가 오고 간 후에서야, 드디어, 작가가 전화를 통해 청소하는 행위를 너무 일찍 정리하러 온 그들에게 일단은 허락 한다는 말이 전해졌다. 그러나 청소를 시작한지 세시간이 더 흐르자 전시 지킴이들의 관용도 한계에 이르렀다. 이해를 구하던 KW직원들도 결국에는 파괴된 파괴의 그림을 인공적으로 다시 연출함으로서, 마치 초조히 기다리던 이 전시장의 규칙을 관객들에게 가르칠 수 없었음을 결국 입증한 셈이 됐다. 작가로부터 무언가 들으려면, 그 당시 작가가 체류 중이던 다마스쿠스로 사비를 들여서 장거리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 외에도 KW사람들은 자기들의 원하는 대로 관객들을 KW에서 쫓아낼 만큼  그 작가와 충분히 오래 함께 일했나 보다.
KW 관계자와의 토론 (비공개 다큐영상의 스틸컷) 자막내용 : 예술작품이 그 과정을 끝까지 이행할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관객 아니, 참여자들이 우연히 마주하게 된 파티사막에서 깨진 유리조각을을 주워 모으고 망가진 기념비를 쓰레기 분리수거와 대질시키며 '정리'의 또다른 의미를 깨우치게 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진행과정에 있는 이 작업의 모든 해석을 만들어 낸다. 이 작업을 어떻게 보느냐와 완전히 같은 예로, 모형으로 된 문화적 기념비를 제 것으로 만드는 듯한 행위, 알콜 중독자적 예술 분야의 자기 파괴, 특히 맥주로 된 피라미드를 비교적 사소한 문제로 보는 경우들이 있다. "이 습득의 범위는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과 정치 시스템에서의 고고학과 발견의 개념에 대한 각각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라고 KW의 웹사이트에서 소개하고 있다.  미술관장의 위치(권력)를 최종적으로 확인 시키는 이러한 글은 모순적이면서도, 결론적으로는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관장)는 동시대의 최고의 가치- 즉, 'Institute for Contemporary Art'에 완전히 맞춤형인, 미학적 결과에만 주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동시대적(컨템프러리) '광범위'가 가능한 한계를 더 잘 반영하고 있는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이라 하면 모든 걸 다 수용한다고들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쫓겨나기 직전의 전시장 일부 모습...

한숨 쉬는 프랑크 에어하르트 발터스의 경우라던가 KW가 떠맞게 된 계산 할 수 있는 피해의 경우처럼, 참여자가 곧 독립(해방)투사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쫓아냄은 그가 스스로 원하더라도 그가 그러한 것이 전혀 될수 없는 경우를 그 예에 추가한다. '당신은 작품과 적극적인 대화를 할 자유가 있습니다'라고 방문자에게 암시한 경우라도, 실제 관객의 자유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이 대화가 어떤 형식으로 벌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무언의 마스터 플랜이 이미 정해져 있어, 이러한 관객에 대한 작가의 태도에 대해, 아무래도 어느 정도 냉소적으로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가 정말로 작가의 뜻인지 의심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태도가 작가가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범위에 속하는지 마저 의심하게 된다. 관객의 해방은 하나의 기호 이상으로, 참여미술의 유행인 큐레이터의 권력과시誇示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원하는 데로 집(전시 공간에 대한 비유)이 지어질 것 이다. 엉성한 비판과 거기에서 거기인 관객들, 그리고 작가들은 큐레이터 앞에서 점차적으로 그들의 태도를 낮추어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순전히 연출된 장면.

전시 „The Recovery of Discovery“에 방문한 관객의 활동범위는 소극적으로 행동하거나 알콜중독자처럼 구는 것중 하나로 명확히 제한되어 있다.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방식으로 읽도록 강요하는 것과 신성한 반성의 일부- 그러니까 문화제와 고대의 것들이 문명의 폐허로 변하게 하라는 황재님의 인가처럼 읽혀지는 '파괴'를 통해 이 전시에 대해 또 다른 불신이 생겨 난다. 결국 이 전시는 오래 전부터 이미 PR과 프로파간다의 프로그램의 하나인, 틀에 밖힌 그림으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나는 그저 하나의 현재Gegenwart을 반영할 뿐이다.  마치 PR과 프로파간다, 그들이 생겨난 과정처럼 같이 말이다. 최근들어 CIA가 공개한 다섯 개의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무음 비디오에 대한 (언론의) 전형적인 반응들은, 다양한 미디어가 랑시에르가 말한 미스터리를 벗겨낸 해석을 어떻게 반응하는 지 보여준다: 빈라덴은 자신의 수염을 염색하고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뉴스에서처럼 굴욕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그는 아무런 희망없는, 이기적이고 전반적으로 불쌍한 상태로 보였다. 몇 일전에 밝혀진 페이스북이 그의 경쟁자 구글에 대해 해온 정치 활동에, 실제로 비판적인 블로거가 그에게 전해진 정보들의 귀족적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 대신에 단순히 그의 이메일을 PR 광고회사에게 그대로 보냈을 경우, 랑씨에르의 전복적전략에 비춰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울리는 그림 : 자아도취중 닳아가는 신화

어쩌면 미리 암시가 된 해석의 연장선들과 약속된 참여공간, 그리고 자신감의 확장이 불신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예측하기 쉬울 것이다. 실제로 하나의 또는 여러 개의 정보전략이 바로 그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SOS로 깃발위에 쓸 만큼 가장 두려운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미디어가 어떤 뉴스를 전하는지, 정보보안이 어떤지, 혹은 독립적인 관객의 참여 여부를 떠나서 말이다.


Cyprien Gaillard
The Recovery of Discovery
KW Institute for Contemporary Art

2011. 03. 27 – 2011. 0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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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2/03/14 09:08 # 삭제 답글

    ㅋㅋㅋ 재밌네요.. 저도 참여미술프로젝트를 해본적이있는데
    확실히 사람들에게 어떠한 일반적인상황과 다른것을 던져놓으면 막상 아티스트가 생각한것만큼 재밌거나 색다른반응은 거의 나오지 않아요.... 오히려 안그랬으면하는반응안 잘나옴. 실망스러우면서도 역시 사람은 사회적동물이라는생각이드네용
  • kunstslash 2012/03/17 05:10 # 답글

    참여 미술에서의 "참여", 그리고 "반응"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재밌는 글이지요. 참여 미술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람을 혼돈 시킨다고 생각해요. 마치 "참여"와 관객 각각의 "반응"이 - 즉 일종의 "대화, 교류"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처음부터 정해진 작가의 의도를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 이상은 아니거든요. 많은 작가가 참여 미술을 통해 대화하려 하죠. 이 대화는 흉내에 그치기 쉽고, 여기서 오는 실망감이 이 글에도 잘 표현된 것 같아요.
  • 천장 2013/12/02 22:22 # 삭제 답글

    참여미술로 포장한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미술이라고 생각되네요. 참여미술이라면, 캔버스와 몇가지 재료만을 주고 관객들이 자유롭게 창작해 나갈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완성작이 작가의 기대에 부흥하는 멋진 모자이크 작품이 되던 알아볼수조차 없는 물감 덩어리가 되던 만인의 관객들의 생각이 합쳐졌다는 점에서는 같은 가치를 지닌것인데 말이지요. 그저 자신의 마음대로 그림이 안그려졌다고 관객들보고 이리해라 저리해라 하는것을 보니 작가는 부모앞에서 투정하는 어린애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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